기록관 건립을 위한 릴레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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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리, 마지막 가을 : 국가에 귀속된 금모래, 은모래

수몰리라? 스님은 그 단어를 싫어한다. 이곳이 물이 잠길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신이 수년째 몸을 누이는 내성천변 그 천막 바닥으로 물이 차오르는 상상은 차마 못하리라. 하지만 현실은 비정하다. 물이 중력을 따라 흐르던 땅에 수십 미터 거대한 영주댐이 신기루마냥 솟아오를 때, 국가, 자본이 만든 이 풍경을 쉬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천성산 도롱뇽의 친구 지율스님 그런 이 중 하나였을 것이다.

4대강 사업이 한창일 무렵, 스님은 낙동강을 따라 이 곳 영주 땅 내성천으로 스며들었다. 모래가 깊이 흐른다고 하던가? 2011년 “지천이 살아야 본류도 산다”고 하면서 회룡포, 무섬마을, 삼강 합수 지점을 부단히 돌아다녔다.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맨발에 차가운 강물과 따듯하게 꺼져드는 모래를 밟기도 했고, 허벅지가 터질 듯 차가운 겨울 강바람 앞에 페달을 밟기도 했다. 해가 갈수록 내성천 주변을 변했다. 강변 버드나무가 무참히 잘려나갔고, 은모래 금모래가 포크레인 속으로 사라져갔다. 농민들은 논에 쭉정이를 두고 떠났고, 그 논에 피를 닮은 벼가 스스로 자랐다. 이내 논은 풀밭이 되었고 숲이 되었다. 문뜩 국가에 귀속 되어버린 식물들의 해방구에서 눈 큰 고라니들을 본다. 그리고 제풀에 놀라 사라져간다.

관측 사상 최악이라는 말은 요즘 믿을만한 것이 못되지만, 무척 가물었던 늦가을 불현 듯 후배와 함께 영주에 갔다. 새로 장만했다는 놈의 차에서는 맑은 물 내가 난다. 평일 고속도로에는 차가 없다. 아니 우리가 가는 영동에서 중앙 고속도로에 차가 없다고 해야겠다.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만큼이나 깊이 없는 언어들이 바람에 날려갈 때쯤 우리는 영주 금광리 야산을 넘어 금강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하늘은 내려앉았고 대기에 스민 수증기는 아련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한동안 그 처연함을 본다. 멀리 영주댐이 가물거리고 풀이 무성한 내성천은 더 이상 모래강이 아니다. 마을은 이제 허물어져 듬성듬성 이 빠진 노인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첫 번째 수몰리,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 금강마을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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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금강마을 들어갈 때 초입의 다리에서 내려다 본 내성천은 모래강이었다. 아침과 저녁 무렵은 금모래고 정오는 은모래였다. 그렇게 건축업자들이 눈독들이던 모래가 준설되어 어느 부잣집 자재가 됐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풀만 무성하다. 앞으로 모래가 떠내려 와도 떠내려갈 자리가 없다. 고여 썩는다. 지금 보이는 풍경은 영주 내성천의 ‘운포구곡’ 중 금강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6곡, 구만(龜灣)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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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이 금강마을을 휘돌아 나오는 운포구곡 중 으뜸이라던 5곡 운포의 모습이다. 전에 산으로 둘러싸이고 내성천이 흘러 구름이 낀 무릉도원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이제 찾을 길 없다. 영주댐을 건설하는 공사장이 되어버렸다. 올해 말부터 담수를 시작하다고 하지만 이 모습을 봐서는 그도 아니다. 영주 댐의 완공을 의도적으로 늦추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도 떠난 지 오랜데 4대강 사업이 완료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의아할 것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은 수자원공사가 떠안은 8조의 부채와 이자 때문이다. 이것을 정부가 해결하길 원하면서 4대강 사업의 일환인 영주 댐으로 내성천을 볼모 삼은 것이리라. 기구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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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댐의 모습이다. 인간의 토목공사 중 으뜸이 댐이다. 거대하고 비싸다. 총 공사비가 한 8천억 쯤 든다고 했지만 결국 1조원이 넘었다. 보상과 주변 공사가지 합친 금액일 것이다. 댐만 3천 억 짜리다. 그런데 이걸 왜 만들었냐고 물으면 홍수방지와 농수확보라 한다. 주변에 홍수가 없었고 물이 부족한 때도 없었으니, 거짓말이다. 아마도 4대강 사업으로 오염된 낙동강 대신 식수로 쓰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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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중앙선 평은역 모습이다. 평은역은 1942년 일제 강점기 말에 영업을 시작해 얼마 전인 2013년에 폐업했다. 아마도 오래전 산으로 둘러싸인 평은면 사람들과 밖의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였을 것이다. 명절이면 이곳에 수많은 귀성객으로 넘쳤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세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질서해지고 해체된다. 그 당연한 귀결이 이렇게 인위적으로 행해질 때 허망하다. 우리는 문득 쉽사리 인정한다. 이곳이 물에 차오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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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에 난 이 신작로에 망연자실 하다. 다니는 차도 없다. 아마도 이 도로 밑까지 물을 채울 모양이다. 참으로 4대강 사업스럽게 한편은 자전거 도로다. 한때는 이런 도로가 지역의 발전을 이야기 했다. 반들반들은 저 아스팔트에선 향기가 났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편리함에 반발해 도로를 엎어버리고 있다. 빠른 속도에 스쳐 지나는 풍경의 경박함만큼이나 우리는 메말라 간다. 그것을 이 풍경이 다시 강요한다. 우리는 조국 근대화 시대에 여전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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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옆은 거대한 공사장이다. 시멘트 회사가 수십 년 동안 파먹은 산을 복구한다고 한다. 복구는커녕 다시 돌을 쪼개 산처럼 위장한다. 부수고 다시 부수고. 지율스님은 이야기한다. “내성천 환경 파괴 말고도 안전이 문제다. 수몰 예정지 주변 도로가 계속 무너져 주민 이주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댐 사업이 부실한 지질 조사와 설계를 바탕으로 추진됐음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한다. 저 멀리 포클레인이 파쇄한 거대한 바위들이 굉음을 내며 하강한다. 한동안 쳐다보면서 중력의 힘에 새삼 놀란다. 위태로운 것은 모두 아래로 무너지는 것이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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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운포구곡의 제7곡 금탄(錦灘)이다. 물여울이 비단을 깐 듯 하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지율스님의 천막이 있고, 수년전 나와 미술가 박은선이 나서 스님과 함께 만든 이동식 전시 공간인 이름하여 ‘모래 스페이스’ 갤러리가 있다. 이제 내성천변에서 녹이 쓸며 외로이 실명의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그래서 스님은 회룡포에 상설 전시장을 만들기로 했다. 내성천에서 그간 기록한 모든 것과 친구들의 작업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우리의 생각은 이렇다. 영주 댐을 철거하고 350만평 수몰예정지를 습지로 조성하는 것이다. 스님과 나도 포함된 내성천 보전운동 모임인 ‘내성천 친구들’의 조사에서 주변은 먹황새와 흑두루미 등 멸종 위기 종을 포함해 22종의 법정보호동물의 서식지가 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이 지역에 낙동강 상류 최대의 인공습지를 조성해 생태관광 지역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댐 건설보다 더 많은 경제적 이득도 가져다줄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 빌려 쓴 자연, 그나마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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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풀밭은 사실 얼마 전까지 농민들의 논밭이었다. 몇 해 농사를 짓지 않으니 이리 됐다. 그리고 아무리 땅을 파도 바위하나 나오지 않는 옥토를 팔고 저 멀리 산 중턱의 그림 같은 유럽식 전원주택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 농민들이 일할 땅은 없다. 그저 수장되는 것은 땅만이 아니다. 사람의 노동이 수장되고 마음이 물이 잠긴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이대로도 좋다.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게만 둔다면 생태가 복원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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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영주 댐이 신기루처럼 서있는 금강마을 전경이다. 수몰리는 그래서 슬프다. 이제 10여 가구 남았다. 수백 년의 인간 역사는 잠기고 흔적을 감출 것이다. 옳은 일인가? 만드는데 걸린 오랜 시간에 비해 파괴하는데 쓰인 시간은 순간이다. 문자로만, 사진으로만 남은 역사는 허무하기에 당대는 저항한다. 그러지도 못하면 우리는 역사를 쓸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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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질 무렵, 금강마을로 들어갔다. 사람이 떠난 집은 허물었고 밭은 경작금지 푯말이 붙었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꺼져있어 더 을씨년하다. 하지만 두 할머니는 늦도록 감을 따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여전할 것 같은 일상의 풍경이다. 그 풍경에서 다시 희망을 느낀다. 강이 흐르고 식물과 동물이 어울리고, 사람이 그 풍경 속에서 하나 되는 모습을 그려본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시작할 때. 

1. 2015년 초겨울 평은리 강변

 내성천 연재의 첫 장을 연 이상엽 작가의 사진 속에는 2015년 초겨울 평은리 강변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흐린 안개 속에 잠긴 마을, 
황폐하게 변해가는 들녘 위로 넘어가는 사양, 
허물어져 가고 있는 평은 역사(驛舍), 
무너지고 있는 산야, 
산허리를 깎아서 만든 순환도로,
물길을 막고 선 거대한 영주댐 콘크리트 장벽

시선은 한 컷의 사진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어느 기슭에서 돌연 공격이 시작될 것 같은 그런 살풍경(殺風景)들 입니다.
지금 저는 그 풍경의 어디쯤에서 한 점으로 놓여 있고, 이 시공간을 빠져나가려 하니 숨이 차오릅니다.

무겁게 내려앉은 안개를 밀어내고 그 풍경들을 다시 빛 속에 놓아봅니다.
맑은 햇살이 들녘에 내려와 있습니다 
풀숲에서 방울새 우는 소리가, 마른 풀들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씨앗들은 바람의 힘을 빌려 모체에서 떨어져 부드러운 땅 위에 떨어집니다.
저 들녘에는 아직 무수한 생명이 기다리는 봄이 있습니다. 

 

2. 이별 

'사는 날까지 예서 안 떠날란다'하시던 이녘할매는 기어이 짐을 싸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벌써부터 큰아들이 대구 시내의 아파트를 구해놓고 재촉을 하던 차였습니다. 짐을 싸다 마시고 할매는 먼저 이주단지 아파트로 이주한 뒷집 일영할매와 작별을 하기 위해 채비를 하셨습니다. 물 길러 갔다가 마주친 저도 자전거를 세워놓고 따라 나섰습니다. 

할매의 손에는 질금 가루를 띄워 손수 쓰신 감주와 휴지통이 들려있습니다. 60년을 넘게 앞뒷집에서 이웃하고 살아오신 할매들에게는 굽은 허리만큼이나 굽어진 무수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별의 시간은 휘어가지를 않습니다. 나오실 때는 그만 주저앉으셔 급기야 제 등에 업히셨습니다. 날아갈 듯 가벼운 몸을 엎고 천근이나 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할매와 함께 이별의 길을 걸어 내려왔습니다. '이게 마지막이가?' 하시며 일영할매가 먼저 눈물을 보이시자, 마을 앞 동호다리가 무너지는 날에도 마당에 앉아 무심히 콩을 가르시던 할매도 끝내는 눈물을 보였습니다.

 

3. 그리움

 이녁할매는 '일을 매조지 못하고 쏘다니기만 쏘다닌다'고 하시던 핀잔도 할 기력이 없어지셨는지
 '나, 가고 나면 물 없어 어에 사노?' 
 '강에 물 많은데 뭔 걱정이세요.'
 '강이 예전 강이라야...'

300회 이상 강길 안내를 했지만 이젠 강으로 내려서지 않습니다. 강은 풀밭이 되었습니다. 자갈이 드러나고 자칫 돌조각에 발이 다치기 일쑤입니다. 때때로 사냥꾼들이 개를 데리고 나타나 강 숲에 깃들고 있는 꿩이나 노루 사냥을 즐깁니다.

단 하나의 가치만이 우선시되는 이 세상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두려움을 소리 내지 못하는 생명들과, 무너져가는 산야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발아래 놓인 세상을 슬픔으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문득,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에서 내려 선 길입니다. 어릴 때 놀던 강변이 너무나 그립고, 스무살 때 처음 보았던 서해 갯벌이 너무 그립고, 비오는 날 혼자 올랐던 운무에 잠긴 설악이 너무 그립습니다. 그리움은 저를 인정 없는 세상으로 내보내고 전쟁터 같은 대지 위에 홀로 서게 합니다.

이곳에서 저는 4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3번이나 세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 난 후, 저로 인해 집주인들이 맘 졸여 하는 것이 불편해 친 텐트입니다. 정부는 강변 뚝방에 친 6평짜리 컨테이너 전시장과 텐트를 철거하기 위한 수순으로 토지인도소송과 토지인도단행가처분 민.형사 소송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4. 영주댐 철거소송 

 지난 10일 진행된 낙동강 대법원 판결은 '낙동강 사업이 국가재정법에 위배 된다'고 했던 2심 판결의 결과를 뒤집으며 법에 의지했던 기대들을 저버렸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더 빠른 속도로 국토를 파괴하는 개발의 방향으로 달려가려 하고, 법원은 그 힘의 진행 방향을 우회할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성천의 친구들은 대한민국과 수자원공사, 시행사인 삼성물산을 피고로 영주댐 철거소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1심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영주댐 철거소송은 큰 틀에서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낙동강에 1급수의 물과 하상을 안정화 시키고 수질 정화를 담당하는 모래를 공급하는 원천이라는 점입니다.

둘째는, 댐을 건설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검토해야 하는 지질입니다. 저는 지질문제에 문외한이었지만 수몰예정지에 머무르면서 영주댐 주변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산사태 현장을 목격하면서 지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영주댐 하부는 지질연대에서 가장 오래 된 시생대와 원생대가 만나고 있으며 두 지질 연대가 만나는 곳에 폭 30m 깊이 150m에 이르는 예천 전단대가 지나갑니다. 또한, 평은리 쪽으로는 내성천 단층이, 안동 방향으로는 오운리 단층이 주변을 지나갑니다.

또 하나의 쟁점은 합천댐 하류에서 15년 동안 일어난 하상의 변화가 불과 2년 만에, 영주댐이 준공되기도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부와 수자원 공사는 '변화는 일시적이며 미미하다'고 주장하며 많은 자료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영주댐 담수가 진행된다면 수년 내에 모래강 내성천은 전설로 남게 될 것입니다. 만일 '변화는 일시적이며 미미하다'고 하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는 누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요?

 

영주댐 45km 하류에 있는 회룡포 강변도 둔치의 모래를 퍼내서 뽕뽕다리 주변을 덮었습니다. 언뜻 보면 외상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은 깊이 내상을 입고 있습니다. 강의 뿌리인 지천의 변화가 그러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강이 낮아지면 가장 큰 변화를 겪는 곳은 지천들입니다. 지천들은 깊어진 본류를 채우기 위하여 쓸려 내려가고, 지하수는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마르게 됩니다. 마치 뿌리가 상하면 잎들이 가장 먼저 시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의해서 보면 강 주변의 식생들도 건조한 지역에서 자생하는 종으로 급격히 변하고 있으며 물을 많이 머금는 버드나무들은 고사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5. 기록으로 저항하다. 

강의 변화에 대한 기록은 하류변화를 증거 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자료들입니다. 강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놓치기 쉬운 사업 시행자들의 언어와 주장, 영주댐을 건설하는 논리와 그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환경영향평가와 전문가들의 보고서, 그리고 법원의 판결과 언론보도 등을 모으고 기록으로 남기려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시점이 오면 우리들이 기록으로 저항한 작업들이 그 바닥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가는 길이 희망이 됩니다. 함께 쓰는 기록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내성천의친구들>이 한평사기로 마련한 회룡포 강변에 4대강 기록관을 세우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6. 

4대강 착공식 뉴스를 듣고 산에서 내려와 강길을 떠돌던 시간 속에서도 가끔은 가슴 뛰던 날이 있었습니다. 2011년, 회룡포 하류에 추진 중이었던 두 개의 보 계획을 막기 위해 '한평사기운동'을 시작해서 600여 평의 사과밭을 구입했을 때와  2014년 추진된 내성천 정비사업을 막기 위해 회룡포 강변에 450평의 땅을 구입한 후, 계획을 취소시켰을 때가 그런 날이었습니다.
 
1평의 지주였기에 '영주댐 중지 가처분' 소송에서는 원고의 권리를 인정받았고, 현재는 영주댐 철거를 위한 본안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심리에서는 4대강 사업으로 훼손되기 전부터 내성천과 낙동강의 원형과 변화를 꼼꼼히 기록한 자료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논리를 세워갈 수 있었습니다.

 

1. 낙동강 제 1경 경천대

 낙동강 제 1경이라고 부르는 경천대 회상 강변의 공사가 시작된 것은 2010년 초겨울이었습니다. 서리가 내린 강변에서 하루를 시작했고, 해가 넘어가면 자전거를 타고 온기 없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두 달 동안 매주 경천대 사진을 들고 서울 거리를 걸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무관심했고 당시 시민사회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습니다.

 

 오히려 관심을 보인 쪽은, 4대강 홍보부장이었던 차윤정 씨였습니다. 그녀는 한 인터넷 언론을 통해 '강, 모래, 풍경, 그리고 지옥'이라고 하는 제목이 붙은 편지글을 제게 띄웠습니다.

그녀는 편지글 서두에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스님께서 보여주신 낙동강의 모래 풍경 사진에 대한 구체적인 실체를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스님, 지금 스님께서 붙들고 계신 낙동강의 풍경은 생태적 실체로 보기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풍경은 환경과 구분되어야 합니다.'라는 훈계조의 글로 시작되었고, 모래가 가득한 강을 '생물들의 지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제 그녀가 지옥이라고 부르던 깨끗한 모래사장은 큰빗이끼벌레 가득한 검은 강물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변했고 아이들은 강으로 내려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5. 그들이 강에서 '본 것'은 우리가 '잃어버릴 것'이었습니다.

4대강 사업을 계획한 사람들이 '강에서 본 것이 무엇일까?' 토건 대통령과 국내 10대 토건기업들이 6개월간의 컨소시엄으로'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의문이 제가 산에서 내려온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헬기를 타고 다니며 강을 보았을 것이며, 지도를 펴서 자신들이 본 것을 빼곡하게 그려 넣었을 것입니다. 그 계획들은 지금 차근차근 소리 없이 추진되고 있으며 그들의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한 특별법들이 소리 없이 추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에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그들이 본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본 것은 우리가 잃어버릴 그 무엇이라는 사실입니다.

 

 위 청사진은 2009년 6월 배포된 4대강사업 마스터플랜입니다. 제방, 비닐하우스, 생태공원이 중복된 강변은 개발계획들이 세워져 있는 곳이거나 잠재적인 개발지입니다. 그들이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본 것은 강이 아니라, 강변 농경지들이며 이러한 개발후보지는 대구 이남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강정보 주변의 '에코워터폴리스' 개발 구상이나 달성보 하류에 세워지고 있는 대구 싸이언스파크, 밀양의 하남국제비행장 유치추진지역 등은 4대강 사업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어김없이 주변엔 수변공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강이 범람하면서 수천 년 동안 조리질해서 만든 옥토들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사업들이 4대강 사업의 연속성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에 별다른 자각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자본이 강에 손대는 것보다, 강이 만들어 놓은 주변 농경지에 손을 대는 일에 더 깊은 슬픔과 비분을 느낍니다.

여의도 면적의 3배 가까이 되는 대구 싸이언스파크는 구지강변에서 퍼올린 준설토로 매립한 부지이며. 2008년에 제정된 산업단지 인허가절차 간소화 특례법에 의해 신속히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법안들은  4대강사업과 함께 시행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도시가 낙동강변이 아닌 지류에 위치했던 이유는 강의 범람 때문이었지만, 준설토 매립으로 이제 강은 범람하지 않는 개발지가 되었으며 그들의 표현과 시선을 빌리면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개발과 그로 인한 부의 산출이 '선'처럼 표현되고 있는 이 시대를 어떻게 진단해야 돌이켜 갈 수 있을까요?

4대강 사업은 사회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합니다. 특히 농촌의 붕괴, 전통의 붕괴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상하면서 본체가 비대해지는 상황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내일은 수없이 많은 오늘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공간이지만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뒤에 올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힘든 시간을 겪게 될 것이며, 필연적으로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합니다.

우리 시대가 저지른 부끄러운 기록들을 계속하고 그 강변 한 기슭에 4대강 기록관을 세우려는 이유는 뒷사람들에게 '4대강 사업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는지 알리는 교훈'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내성천, 물위에 쓰는 편지 / 손아람

오래되고 곤혹스러운 쟁점들이 무(無)와 밤으로 해소되었다.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 버린다. 주위를 둘러보라.
 _<로드>, 코맥 매카시

 

 작년 겨울 다시 찾은 내성천은 늦봄의 목가적인 풍경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갯버들은 목이 비틀어졌고 강은 군데군데 얼어붙어 흐름이 더뎠다. 봄에 한번 그랬듯 지율스님을 따라 모래 강변을 맨발로 걸었다. 스님은 모래가 차서 동상에 걸릴 수도 있으니 어서 신발을 신으라 권했고, 나는 두 손에 신발 한 짝씩을 든 채 양말에 모래가 들러붙는 게 싫다고 대답했다. 진흙과 얼음에 진로가 막힌 강을 느린 걸음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율 스님은 해매다 유실되는 모래와, 생명력을 잃어버린 강의 높이와, 늪이 되어버린 금모래밭에서 자라는 갯풀과 모래알 사이에서 밟히는 밟히는 자갈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눈에 비친 삭막함이 정말로 강이 죽어가는 탓인지, 해마다 순환하는 봄의 소생이 강렬하고 유일한 인상으로 남았던 탓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답사 내내 살아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귓전에서 엥엥거렸다. 바람은 마치 사람이 울듯이 울었다. 혹시 정말로 사람의 울음 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는 것인지 잠시 귓바퀴를 세우고 둘러보았지만 움직이는 것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바람이 곡소리를 낸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는 의심을 쉽게 거두었다. 강둑 위 스님 거처로 돌아와서야 나는 그것이 진짜 여인의 곡소리였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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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인근 동호마을의 남성이 강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동행하던 기자가 소식을 듣자마자 자전거 두 대를 구해왔다. 그를 따라 현장을 향해 바로 출발했다. 나는 죽은 자의 비극이 수몰예정지구로서 마감이 다가온 마을의 수명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라 직감했고 아마 기자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현장까지는 몇 킬로미터 거리였다. 여인의 나이를 식별할 수 있을만큼 곡소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나는 머릿속으로 비정한 상상을 펼쳤다. 정말로 그 먼 곳까지 곡소리가 들렸던 것일까? 그렇다면 곡소리에 담긴 여인의 슬픔이 그렇게 컸던 것일까? 아니면 강이 낸 좁은 길을 따라 몰려다니는 바람이 곡소리의 회절과 산란을 막았던 탓일까?

이미 경찰차가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허술한 경계를 비집고 들어갔다. 강물에 떠내려와 모래밭에 걸린 채로 발견된 사람은 오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등산복 차림에 신발까지 신고 있었다. 피부가 서리 돋아난 것처럼 하얬지만 색이 변하거나 물에 불어 훼손된 흔적은 없었다. 망자는 그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뻣뻣하게 굳은 시신을 품에 끌어 안고 악받힌 울음을 울었고, 마을 주민 몇 명이 강둑 위에 뒷짐을 지고 서서 혀를 찼다. 감히 유족에게 다가가 호기심을 채울 수는 없었으므로 주민 한 사람을 붙잡고 어쩐 일인지 물었다. “집안일입니다. 제발 돌아가시오.” 주민의 대답은 짤막했고, 경계의 눈빛으로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기자는 굳이 프로답게 대응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섰다. 나는 그를 따라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발을 돌려 스님의 거처로 되돌아왔다. 주민의 적개심은 어쩐지 정당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생각날 때마다 검색해 보았지만, 그날 내성천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기사는 발견할 수 없었다. 관광객이 아닌 주민의 죽음이라 기사로 담기 어려운 어떤 사정이 있었으리라. 가솔을 잃은 가족의 삶도 똑같이 계속되는 것인지. 그날밤 나는 버려진 민가에서 잤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두텁게 눈이 내렸다. 마을은 설몰(雪沒)되었다.

봄햇살에 부서지는 초록의 빛깔이 예뻐 주로 봄을 담았다는 지율스님의 <모래가 흐르는 강>으로 나는 내성천을 접했다. 그해 봄, 나는 처음으로 내성천을 방문했었다. 풍광은 영상 그대로 아름다웠고, 그리하여 나는 늦봄의 훈풍과 저녁을 밝히던 은은한 등불과 사그락거리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두런두런 나누던 잡담으로만 내성천을 기억했다. 내 머릿속에서 그곳은 늘 봄에 머물러 있었다. 작년 겨울 목격한 을씨년스러운 죽음은 내성천에 대한 내 기억은 물론이고, <모래가 흐르는 강>마저 모래처럼 무생물적인 기록은 아니었나 되돌아 보게 했다. 내가 아는 것은 사라져가는 것들의 이름과, 추상적인 아름다움과, 그 숫자였다. 구체적인 삶의 분위기가 아니라. 지난 봄의 기억 속에서도, <모래가 흐르는 강>의 기록 속에서도 삶의 모습은 정지된 채 윤곽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지율 스님의 두번째 다큐멘터리인 <내성천, 물 위에 쓰는 편지>는 전작이 스쳐 지나갔던 삶과 생명의 틈에 관한 기록이다. 카메라는 물보다 물가를, 물가보다 제방 위에서 소멸해가는 생명들을 더 많이 담아낸다. 무르익은 봄 대신 삶의 한 주기가 저문 늦가을에서 겨울까지 촬영한 영상은 전작보다 덜 화사하여 도리어 더 큰 종교적 생명력이 느껴진다. 화면에 담긴 피사체부터 계절과 배경까지 하나같이 촛불처럼 꺼져가는 것들이다. 공간을 훑는 대신 시간을 묵혀서 선택한 결과인 것일까?

한 해 한마리꼴로 발견된다는 붉은 부리의 먹황새는 폭설을 헤치며 먹이를 구한다. 사람이 떠난 빈집에는 진돗개 한 마리가 철목줄이 묶인 채 버려져 낑낑거린다. 숲그늘이 드리워진 모래강 위로는 천연기념물인 원앙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물가에서는 고라니 무리가 조심스럽게 목을 축인 뒤 총총 걸음으로 달아난다. 수풀 사이에서는 점박이 삵 한 마리가 몸을 잔뜩 웅크려 포복하고 있다. 보랏빛으로 물든 서녘하늘은 산허리에 붙들려 희미해지고, 초저녁 민가의 아궁이 연기를 쫓아 반딧불이가 몰려든다. 스님이 면도날로 조용히 머리를 미는 강뚝의 천막 안으로 멸종위기종인 물떼새 한 마리가 소낙비를 피해 날아든다. 바지를 적셔가며 냇가에 뛰어든 아이들이 검은물잠자리를 붙잡는 동안, 뒷편 산기슭에서는 굴삭기가 망설임없이 땅을 파헤친다. 벌써 굴삭기가 밀고 지나간 말라붙은 철거터에는 허리가 구부정한 할매들이 그새 밭을 꾸렸다. 밀양의 기억이 잠시 스쳐지나간다. 왜 항상 사라져가는 땅에 남는 마지막 사람은 할매가 되는지.

 

추석 쇠러 갈 데도 올 사람도 없다는 할매를 찾아 쌀과 떡을 들고 찾아오는 이는 가족이 아니라 수자원 공사의 공무원들이다. 기분이 조금 들뜬 할매는 뭔지도 모를 합의서에 지장을 찍어 내준 뒤에 고집스러운 한 마디 말로 종이에 적힌 계약을 철회한다. "가긴 어딜가, 죽어도 여기서 죽을라 칸다. 물들어오면 생목숨 죽든. 이런 놈의 꼬라지가, 세월도 무슨 놈의 세월이 내대로도 못살구로 하이." 콩밭 가을걷이를 끝내자마자 쓰러진 할매의 집에 다시 굴삭기가 들이닥친다. 70년된 집이 한 시간만에 허물어진다.

<물 위에 쓰는 편지>는 물과 함께 사라져가는, 물에 의존한 삶의 양식의 기록이다. 몇년 전 인터뷰로 만난 지율 스님은 나에게 스스로 '생태주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며, 그건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붙여준 이름일 뿐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었다. 동체대비(同體大悲), 살아있는 모든 것은 뿌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나섰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물 위에 쓰는 편지>는 식단을 관리하는 영양사처럼 생태적 이득을 계산하지 않고, 인간의 생존과 짐승의 생존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기색이 없는 불가적 시선의 다큐멘터리다. 스님이 영상 말미에야 물 위에 띄운 짤막한 편지의 내용에 할 말이 다 담겨 있다.

 

물맑은 내성천 금모래 강변과
그 안에 깃들던 모든 것이
지금 우리 곁에서 떠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염원을 물 위에 쓰고
우리의 기도를 바람에게 전한다.
비옵나니,
헤매는 마음들을 헤아림 하시어
두려움에 떠는 이 땅의 모든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강과 하늘을 지켜가게 하소서.

 

금모래 강변에 깃들던 모든 것들. 지율스님에게 내성천의 모든 사물은 하나의 범주를 지키다 소멸해가는 마지막 사례로서 띄엄띄엄하지만 대등하게 엮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철거 공문이 떨어진 지율 스님의 움막과 컨테이너 전시실 역시 이 운동을 간신히 범주로 성립시키는 우리 세계의 마지막 사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거를 목전에 둔 게 과연 무엇인지는 조금 더 기다리며 살펴보아야할 것 같다. 올해, 스님은 영주댐을 철거하라는 소송을 시작했다.

5일의 마중 /안영춘

남편 이름으로 온 편지에는 "5일에 집으로 돌아가노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남편은 오지 않았다. 역 앞에서 웬 낯선 남자가 주변을 오래 서성이기는 했으나, 남편은 아니었다.

영화 <5일의 마중>(감독 장이머우·2014)은 유독 남편 얼굴만 알아보지 못하는 심인성 기억상실증 아내와 그런 아내 곁을 지키는 남편의 이야기다. 평자들은 이 영화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그 이후를 '상실'의 정조로 재현했다고 짚었다. 맞는 분석이긴 한데, 충분한 분석인지는 모르겠다. 이를테면 그 분석에는 '어떤 상실이냐'가 결정적으로 상실되어 있다.

마지막 신에서 두 사람은 바로 직전 신보다 많이 늙어 있다. 아내는 여느 5일처럼 역 앞에서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남편은 아내가 눈을 맞지 않도록 곁에서 하염없이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 나는 이 장면을 '상실은 해석돼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었다. 남편은 상실을 해석함으로써 아내에게 새로운 존재가 되어 관계를 이어간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나는 영화나 "둘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로 끝나는 영화들과 달리, <5일의 마중>은 그렇게 '끝날 수 없는'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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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의 마중> 같은 이야기가 여기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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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나는 내성천을 여러 차례 발로 걸어서 답사했다. 그러나 내가 첫사랑의 미열처럼 떠올리는 건 이듬해 봄 동호마을(경북 영주시 평은면) 물길에 첫발을 담갔을 때다. 물과 모래와 산이 어우러진 빛의 풍경은 차라리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걷지 않고 다만 스미는 듯했다. 그러나 닥쳐온 시간은 험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내성천은 영주댐 자리를 경계로 상·하류가 제가끔 피폐해졌고, 댐은 그보다 앞서 그만큼씩 우뚝해져 있었다. 댐은 홍위병의 깃발처럼 확고부동하게 나부꼈고, 내 기억은 '상실감'으로 개기일식처럼 검게 먹어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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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전세버스를 타고 지율 스님이 이끄는 대로 찾아간 내성천 어느 마을은 이미 폐허 자체였다. 길은 죄다 변해서 어디로 드는지조차 식별할 수 없었다. 위로는 벌겋게 파헤쳐진 산허리에 도로와 다리가 까마득히 얹히고, 아래로는 주민들이 버려두고 떠난 논과 밭으로 들풀들이 웃자라 있었다. 폭설에 덮인 빈집에 들어 일행들과 오들거리며 하룻밤을 났으나,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고 난 지난봄, 영주댐 일대를 모두 돌아보고 다시 그곳에 이르러서야 머릿속 지도에 좌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으로 동호마을을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끝내 그리 될 수는 없을 터였다.

끝은 어디일까. 끝은 어떤 모습일까. 끝을 떠올리는 건 어느새 습관으로 굳어버렸지만 끝은 좀처럼 형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댐 완공 뒤를 보여주겠다는 조감도가 형상하는 것은 그 끝의 사실에서 가장 먼 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총천연색 그림에서 내성천의 들숨 날숨 같은 물굽이와 모래톱의 웃고 우는 잔주름과 수달, 노루, 고라니, 흰목물떼새, 물자라, 왕버들 같이 스러져가는 뭇 생명의 정처는 어디 한 곳 점으로도 표시돼 있지 않았다. 애초 살아서 추방된 것들의 자리는 토건의 망상으로 그린 그림의 소실점 너머에 있었다.

 
그러나 동호마을 강변에는 아직 그대로인 것이 있다. 자매처럼 나란히 선 지율 스님의 움막과 '모래'라는 이름의 컨테이너 갤러리이다. 움막은 겉이 삭고 컨테이너는 군데군데 녹슬었지만, 그것은 내성천과 함께한 시간의 흔적이다. 이 둘은 <5일의 마중>에서 달력 한 장 한 장마다 '5일'에 표시된 동그라미처럼 흐르는 시간을 따를 뿐이다. 자연사(死)는 움막과 컨테이너가 꿀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꿈처럼 보였다. 댐에 견주면 점보다 작고 허술한 이 '건축물'은 댐에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건축물들이 줄줄이 맞은 타살의 운명을 비켜갈 수 있었고, 상실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장소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해석은 기록 위에서 자라나는 나무다. 돌이켜보면 그곳에서 이루어진 일은 '기록' 말고 없었다. 달리 더 있을 수도 없었다. 지율 스님이 처음 움막을 세웠을 때도 강과 들과 마을과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저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서울 조계사 들머리와 홍대 앞 두리반 철거 반대 투쟁 현장을 오가던 '모래' 컨테이너가 옮겨왔을 때는 벌써 그 손아귀의 악력이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저들의 살뜰한 도륙에 맞서 행사할 수 있는 물리력은 처음부터 없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진해질 노릇이었을 테니, 두 눈 부릅뜨고 하나하나 기록하는 일은 극한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지 않았다면 지금 단 한 사람도 기억상실에서 예외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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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의 마중>에서는 끌려간 남편이 아내에게 썼던 편지들이 커다란 상자 하나 가득하다. 편지들은 제때 부쳐지지 못하고, 남편과 함께 왔다. 아니, 편지는 오고 남편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남편이 뒤늦게 온 편지를 아내에게 읽어준다. 편지를 읽고 듣는 일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일상이 되었다. 둘의 관계는 끝나지 않고 그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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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스님이 기록을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할 때와 어금버금하다. 사업 소식이 들리자 스님은 가장 먼저 낙동강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으로 갔다. 불가에서 말하는 발보리심(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었을까. 스님은 "이끌렸다"고 했다. 스님은 걸어서 낙동강 최하류 을숙도까지 갔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으며 갔다. 고행과 순례의 시작이었다. 그 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전 구간을 혹은 구간을 나눠 발품 팔아 낱낱이 기록했다. 다시 들른 자리는 매번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과정을 겪은 이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고, 기록한 자만이 비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시절기 나듯 들르는 내게도 변화는 빠르고 확연하게 다가왔다. 낙동강은 살풍경으로 변해갔다. 지산습지와 해평습지, 습지라는 습지는 모두 파헤쳐져 사막이 되고, 마침내 경천대 앞 곱고 너른 모래밭마저 거센 물살이 차고 흘렀다. 그러나 파괴는 상실이 아니었다. 파괴 이후가 상실이었다. 토목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의 미학으로 인공을 들어앉혔다. 그 꼴이 거푸집에서 콘크리트로 찍어낸 '생각하는 사람' 상만큼 조야해도, 과정을 모르면 감쪽같을 터였다. 그것이야말로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르는, 완전한 상실일 것이었다.

 

내가 하릴없이 낙동강 본류를 바라볼 때, 지율 스님은 어느덧 여러 지천들로 눈길을 돌렸고, 이내 내성천으로 들어 다시 기록을 시작했다. 내성천은 낙동강의 유년기 꿈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파괴는 시작되었다. 스님의 기록 작업도 거듭되었다. 작업은 이어질수록 정교해지고 기록은 쌓일수록 저절로 이야기가 되어갔다. 지율 스님의 기록은 사진전으로, 두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모래가 흐르는 강>과 <내성천, 물 위에 쓰는 편지>)로 세상에 나왔다. 그림 그리는 박은선은 스님 곁에서 끈질기게 내성천의 생명들을 그림으로 기록해 <내성천 생태도감>을 내놓았다.

 
지율 스님의 두 번째 영화 제목에 '편지'가 들어 있는 것은 마치 의도하지 않은 대유법 같다. 스님의 기록은 편지다. <5일의 마중>에서의 편지 또한 기록이다. 무엇보다 둘 다는 상실에 대한 해석이다. 어느새 지율 스님의 기록은 <5월의 마중>의 남편 편지보다 훨씬 많아졌다. 기록(편지)으로 매개된 상실의 해석은 끝날 수 없는 이야기(영화)다. 비관적 낙관주의자에게는 역사상 가장 질기면서 가장 거대한 사기인 종말론이 애초 없듯이.

영주댐은 12월 들어 물 채우기에 들어갔다. 스님과 '내성천의 친구들'이 낸 영주댐 철거 소송은 지난 18일 1심에서 원고 패소했다. 하지만 황동규의 비관적 낙관주의의 시 <즐거운 편지>처럼, 저 기록들이 있는 한 물 채우기와 패소는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다. 앞으로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이다. 언젠가는 고운 모래강을 되살리고 황야로 변한 강가 들녘을 뭇 생명들의 습지 낙원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에, "그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상자에서 편지를 꺼내 아내에게 읽어주듯, 지율 스님을 비롯해 내성천과 낙동강의 본디 모습을 아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방대한 기록을 보존하고 읽게 할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4대강 기록관은 상실의 해석을 위한 장소이자 비관적 현실을 낙관적 의지로 넘어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우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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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무리할 즈음 '사소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23일 동호마을 강변 움막과 컨테이너가 강제 철거되었다고 한다. 박은선이 현장으로 달려가며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못난 사람들. 이런다고 굴복할 줄 아시나." 움막과 컨테이너는 자연사하지 못했으나, 자연사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머잖아 회룡포(경북 예천군 왕궁면) 내성천 가에 움막과 컨테이너의 품성을 빼닮은 아담한 기록관이 들어설 테니까. 생명을 지키려는 싸움은 끝나려야 끝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