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숨결느끼기 순례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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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연어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1박 2일의 여정,

 

그 여정은 기막힌 대조법의 만남이고 바라봄이었다. 맑음과 탁함, 곡선과 직선, 느림과 빠름, 고즈넉함과 분잡스러움, 자연소리와 소음, 아름다움과 추함, 흐름과 막힘 등, 무엇보다 가장 큰 대조법은 살림과 죽임이었다. 강이 무한한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살림이라면 4대강 사업이라는 미명아래 곳곳에서 자행하고 있는 공사현장은 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나아가 그것을 품고 있는 강마저 파괴하고 있었다. 그 대조법을 만나고 바라봄으로써 가슴은 아픔을 느끼고 나아가 분노심마저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회색빛 연어는 검정과 흰색을 다 품어 안으면서 담담하게 대조법 너머의 세계로 뚜벅 뚜벅 걸어들어 갔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간간히 가다가 멈추고, 또 다시 가고, 연어가 어느덧 강이 된 모습을 본다. 대조법 너머의 세계를 껴안은 상생의 흐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 이번 여정인지도 모른다.

 

첫째날

 

회색빛 연어가 촘촘하게 짜 놓은 그물망에 그물코가 되어 순례길에 나선다. 발걸음 떼기는 상주터미널에서 시작되었다. 터미널과 역이 만남과 헤어짐의 장이라면 순례의 첫 출발지로서 가지는 의미가 크다 하겠다. 떠남은 돌아옴을 전제로 하고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그래도 그 돌아옴은 이전과는 다른 성숙하고 변화된 나로 돌아옴이요 헤어짐은 더 큰 만남으로 바뀔 것이라는 믿음에서 떠난다.

지율스님의 눈으로 마음으로 강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때서야 스님이 보여주고자 한 세계와 낙동강이 내쉬는 숨결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첫 조각 강창교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어름에 따스한 기운을 느끼며 강창교를 느릿느릿 건너간다. 강창교 밑으로 흘러가는 강물에 눈을 둔다. 강물이 탁하다. 눈살이 찌푸러진다. 강물이 맑지 못하고 탁한 이유는 위에서 상주보 건설 공사 때문이라고 한다. 강창교를 건너 강둑길을 올라 논길을 건넌다. 얼었던 땅이 슬슬 풀려가는 즈음이라 신발바닥이 질퍽거리고 물컹대는 느낌을 받는다. 논이 살아 꿈틀댐을 알 수 있다. 화순에서 유기농 농사를 지었다는 분의 말씀으로는 “유기농 논 1㎝ 크기의 흙 속에 많은 수의 미생물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더 큰 세계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논을 다 건너갈 즈음 눈에 들어온 풍경, 강창교 다리 너비의 5배는 족히 넘을 논들이 길게 파헤쳐져 있었다. 물가를 죽 따라 제방을 쌓고 제방 주변에 자전거 도로와 생태공원을 만들기 위해서란다. 이로 인해 사라져 가야할 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강이 드나들며 태어난 강 주변 논들이 4대강 사업이라는 미명하에 죽어간다.

 

논둑길 다 건너 맞닥뜨린 곳 33공구 건설사무소 그리고 ‘현대건설’ 간판, 그 간판은 4대강 사업의 본질을 이야기 해주는 상징이다. 브레이크도 없고 무한질주하면서 꾸역꾸역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괴물 아가리로 간판은 변한다. 그 간판이 우리를 짓누른다. 끔찍하다. 봄이 거꾸로 겨울로 간다.

 

- 두 번째 조각 상주보 공사현장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돌덩이 안고 짐짓 내색하지 않으며 마을을 지나 밭둑길로 접어들었다. 멀리서 덤프트럭이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바쁘다. 덤프트럭이 쉴새없이 제방 아래 논들에 모래를 갖다 붓고 있다. 논이 모래에 짓눌리고 주변 나무들도 잘려나갔다. 아프다.

 

상주보 공사 현장에 올랐다. 저 너른 강바닥을 마구마구 파헤치고 있다. 굴삭기와 덤프트럭이 쉴새없이 왔다 갔다 한다. 보를 높게 만들어야 하니 강바닥을 깊게 깊게 파내려간다. 깊이뿐만 아니라 넓게 파헤쳐간다. 4대강 사업이 대운하의 전초전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현장이다. 강이 울부짖고 있다. 고통을 못 참아 절규하고 있다. 아비규환이다. 경기도에서 오신 분은 이 광경을 보고 앞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한다. “지금 저 강은 병원에서 수없이 많은 링거 바늘을 꽂으셨던 어머니의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강바닥은 무수히 많은 긴 강판이 꽂혀 있었다. 직접 현장에 와서 보지 않고서는 그 느낌을 온전하게 떠올리기가 어려우리라, 전율을 넘어 아픔의 밑바닥에 가 닿는다.

 

회색빛 연어를 따라 강을 거슬러 모천회귀하던 우리들은 망연자실할 뿐이다. 무수히 많은 알을 품을 어머니의 자궁은 통째로 생채기 천지다. 강이 피를 흘린다. 옆에서 강바닥을 파헤치다 맞닿은 암반을 깨뜨리는 굴착작업을 하고 있다. 엄청난 굉음이다. 숨이 목구멍에 차올라 헐떡이는 강의 심장을 굴착기는 겨눈다. 아내가 “저 굴착기 소리는 내 심장에다 대못을 팍팍 박아대는 망치질 소리”라고 말한다. 눈을 홉뜨고 바라볼 뿐이다. 아픔의 끝자락은 분노다.

 

- 셋째조각 청룡사 전망대

 

강을 거꾸러뜨리는 상주보공사 현장을 벗어나서 일명 자전거도로라고 만들어진 산길을 따라 청룡사 전망대로 향하였다. 웃음이 나온다. 계속하여 헛웃음이 나온다. 강을 직선으로 만들다보니 그 강을 따라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는 구상이 산을 향하여 난 급경사 직선 자전거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무지의 극치다. 한 번도 현장에 와 보지 않고 지도상에 선을 그어놓고 그 설계도에 따라 자전거도로를 만든 탁상행정의 표본이다. 그 탁상행정에 따라 애꿎은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멀쩡한 산이 살점을 드러내고 있다. 용감한 무식이 저지른 만행의 현장이다. 웃다 못해 짜증이 나고 짜증은 화를 부르고 화는 욕지기로, 내 마음은 어느덧 평화를 잃었다. 파킨슨병을 앓고 계신 장모님을 7년째 모시고 있다는 마음 순하디 순한 아저씨께서 울분을 터뜨린다. “눈물이 난다고, 막 눈물이 나고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미래의 아이들에게 온전한 자연을 물려주지 못한 못난 어른이 되어서 미안하다고” 그 눈물을 안고 전망대에 올랐다. 강이 지닌 본래의 모습은 어떻고 그것이 공사로 인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눈 부릅뜨고 조망해 본다. 한눈에 들어오는 저 거꾸로 뒤집힌 물줄기여,

 

청룡사로 발길을 향하다 완만하게 굽이치는 강을 바라본다. 강 물줄기 따라 모래사장이 넓고도 길게 펼쳐져 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강물의 문양에 넋을 빼앗겼다. 진녹색의 태극문양이 강물에 새겨져 있었다. 황홀경에 빠져 있는데 뒤통수를 내리치는 스님의 죽비소리, “강물 저편 너머 넓게 정리된 지역은 원래는 비가 많이 오면 섬이었다. 일명 오리섬이라고, 버드나무를 비롯하여 숲이 울창하였고 그 속에 노루가 50마리 넘게 서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종 동물의 생태보고였노라고, 그런데 생태공원을 만든다고 기존의 천연 생태지를 완전히 싹 밀어버렸다고” 스님의 죽비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전의 오리섬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잘 그려지지 않는다. 계속되는 죽비소리 “이전의 한강모습을 한번도 보지 않고 지금의 한강만을 보고 자란 세대에게는 지금의 한강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다고, 낙동강도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처음 지녔던 본래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또한 파괴되어가는 모습도 사진에 담는다고, 언제가 다시 복원해야 할 때 원래의 모습이 어떠한지 증언해야 한다고”, 스님의 눈 속에는 본래 있었던 것과 변한 것 모두 다 정직하게 담겨있다. 추함도 아름다움도 잡스러움도 모두 다 품고 있었다. 분노는 무심으로 달음질친다.

 

상도 촬영지, 이국진 강습사회원이 상도 2부작중에서 일부분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한다. 슬몃 웃음이 터진다. 그러면서 하는 말 “지금 이곳의 모습이 전에는 어떠했는지를 알려면 상도 2부작에 나온 배경을 보면 된다고, 강가를 따라 버드나무가 울창하게 심어져 있었노라고”, 상상력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이전의 모습을 그리려면 이전에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 넷째 조각 펌프장 예정지

 

장마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삼강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펌프장이 설치될 예정지로 향하였다. 보막이공사로 인하여 수위가 높아지면 지류의 물들이 자연배수가 안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펌프질을 하여 강제 배수를 시키기 위하여 펌프장을 만든다고 한다. “자연 강물은 들보다 낮게 흘러야 하고, 강물을 조망하려면 위에서 내려다보면 되는데 보막이 공사를 하여 수위가 높아지고 제방이 높아지면 강물은 들보다 높아지고 사람 위에서 흐르게 된다.” 스님의 이러한 말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지류의 펌프장 예정지 공사 현장이었다. 논과 논 사이를 가늘게 흘러가는 실개천과 실개천이 만나 마을 앞을 지나 여울져 흘러가는 실핏줄과도 같은 지류에 어마어마한 높이의 제방 공사가 쭉 논길을 따라 넓게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도 어김없이 길죽한 쇠강관을 촘촘하게 박아대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사장 앞 마을 입구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고향에 오심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무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수몰예정지와 공사 지역내 땅 보상문제로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을 주민들간의 반목과 갈등, 그것을 부추기고 이간질하는 정부, 이제는 오랫동안 고향을 지키고 묵묵히 살아온 그네들의 순박한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따라서 마을 공동체는 절단나고 있었다. 이전에 남편과 함께 3개월 동안 낙동강을 따라 ‘4대강 사업 반대’ 걷기를 하였다가 이번 순례에 혼자 참여한 아주머니가 가슴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통한의 말 “저 지류공사는 우리의 실핏줄 하나하나 , 모세혈관까지도 절단 내고 있다.”

 

새참이 오면 논에서 일을 하다 흐르는 땀과 발을 씻기도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흙 묻은 삽을 씻기도 한 그 개천은 어디로 갔는지,

강은 아래로 흘러야하는데 구름처럼 우리 머리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뒤집힘이라니,

스님의 송곳 같은 말 한마디 “나중에 이 펌프장이 제 기능을 못했을 때 빚게 될 비극은?”

 

- 다섯째 조각 삼강

 

삼강 주막을 뒤로 한 채 다리를 건너간다. 다리 높이가 제법 높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함마저 든다. 다리는 세 강이 한 몸을 섞어 내려오는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안동에서 내려오는 낙동강, 영주에서 예천을 거쳐 내려오는 내성천, 충청도에서 문경을 거쳐 내려오는 금천, 세 물줄기가 모두 이곳에서 만나 더 넓은 물줄기를 만든다. 우리가 거쳐온 상주보에 물을 가두게 되면 이곳의 물높이는 더욱 높아질 것이고, 그래서 다리를 2m 더 높이는 공사를 할 것이라고 한다. 아니 2m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자연 물길을 거부하고 위로만 제방을 쌓아 물만 가두면 된다는 생각 속에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기후변화에 의한 갑작스러운 집중호우가 발생한다면 위험 수준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재앙이 발생한다고 한다. 실제 현장을 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나와 저들의 무시무시한 무지,

 

순례길 따라 나의 무지가 부끄럽게 무너져 내린다. 무심히 바라 본 삼강의 물은 나의 생각은 아랑곳없이 느릿느릿하게 긴 곡선을 그으며 흘러 내려간다. 강물은 가두어서는 안 되고 흘러야 한다.

 

- 여섯째 조각 회룡포

 

내성천을 거슬러 회룡포로 간다. 회룡포 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임을 수줍게 표현하고 있다. 회룡포 들어가는 길은 순례객의 마음을 닮았다. 구불구불한 길은 부끄러움의 길이다. 사람이 사람 꼴을 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다. 앞서 거쳐 온 길들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뻔뻔스러운 길로 변질되고 있다. 길을 걷는 사람의 숨결도 그 길을 닮는다. 구불구불한 길을 걷는 순례객의 숨결은 부드럽고도 따스하다. 구불구불 느리게 걷다보니 숨결 또한 느리고 완만하게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면서 한없이 온화해진다. 장안사를 지나 비룡산 정상에 올라 전망대에 섰다.

아!

 

마을을 옴자 모양으로 휘감아 돌아가는 강물을 보자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강물이 만들어낸 비경을 보자 갑자기 서러워진다. 서럽다 못해 눈물이 나온다. 가슴 밑바닥에서 아픔이 터져 나온다. 그 밑 모를 아픔의 정체는 무엇인지, 숨이 턱 턱 막힌다. 강물이 토해내고 있는 원형질의 고운 숨결을 눈으로 마신다. 많은 사람들의 카메라가 분주하다. 숨결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응시할 뿐이다. 물굽이 흐름따라 마음을 저절로 내려놓는다. 마음이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막힌 것 없이 강물따라 내 마음도 자연스레 흘러간다. 막혔던 숨길이 터진다. 강물을 가두어서도 안 되듯이 숨결 또한 가두어서는 안 된다.

 

미얀마 승려들이 평화시위 때 사용한 문구를 보고 스님께서 안내장에 쓴 글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자유로와 지기를!, 번뇌와 두려움과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기를!”

또렷하게 더욱 커진다.

뽕뽕다리를 건너간다. 유쾌하고 마냥 신난다. 강을 따라 넓게 모래 사장이 펼쳐져 있다. 육지속의 섬마을 회룡포를 지나 내성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스님의 발걸음이 간간히 멈춘다. 그 멈춘 곳에서 스님의 눈으로 내성천 풍광을 둘러본다. 내성천에 도착하였다. 모두들 아이가 되었다. 너도 나도 없다. 사람도 자연도 없다. 경계가 허물어지니 구분지음 또한 없어진다. 강물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하여 강으로 들어갔다. 강물이 혈관을 타고 손끝으로 전해오면서 손짓과 몸짓이 절로 난다. 신명나고 흥겹다. 뉘엿뉘엿 꼬리 길게 늘어뜨리는 해넘이를 뒤 풍경으로 간다. 풍경을 바라보다가 풍경이 되었다.

 

- 일곱째 조각 구담

 

첫째날 순례길 종착역 구담으로 향한다. 구담은 낙동강 한가운데 형성된 자연습지로 어둠속에 묻혀 있다. 다리위에 섰다. 기막힌 대조법의 압권이다. 오늘 여정을 압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리위에 서서 오른쪽으로 눈 돌리니 저녁이내를 밀어 올리는 숨죽인 강물의 실루엣이 환상으로 다가온다. 전율이 짜르르 흐른다. 고개를 왼쪽으로 틀었다. 저 너머에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쉼 없이 쿵, 쾅, 쿵, 쾅,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는 밤도 잊었다. 무섭게 돌진하는 폭주기관처차럼 저 빠르게 밀어붙이는 공사현장의 그 속도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되돌아봄도 한치의 주저도 없다. 무섭다. 아니 강이 몸을 난도질당하며 뱉어내는 신음소리에 나도 질식당할 지경이다.

 

극과 극의 대척점위에 나는 서 있다. 살림과 죽임의 두 경계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동시에 함께 펼쳐 보이는 두 풍경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애써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스님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길 위에 선 스님, 스님은 묵묵히 그 경계에서 그 선들을 지우고 있었다. 스님의 머리가 유난히 환하게 빛난다. 물방울이다. 수 천 수 만의 물방울을 데불고 흘러가는 물방울이다. 그 물방울이 모여 또 하나의 강물을 이루고 있었다. 아래로는 어둠속으로 돌돌돌 강물이 흐르고 위로는 순례의 행렬이 강물을 이루어 흘러간다.

 

둘째날

 

하회황토 건축학교에서 잠을 달게 잤다. 이전에 광덕초등학교를 개조하여 만든 시설인데 순례객들을 위해 숙소를 만들었다.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해주신 건축학교 교장선생님은 훤칠한 키만큼이나 마음 씀씀이가 크다. 그 마음 바탕 때문에 더 달게 잤는지도 모른다. 아니 함께 잠자리 한 사람들의 좋은 기운이 넘나들어서 무척이나 행복한 잠자리가 되었는지 모른다. 다들 살아가는 자리 다르고 순례에 참여한 사연도 다르지만 함께 한 사람들의 마음 바탕은 한가지 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마음을 지녔으니까. 그래, 아름다움은 강에만 있지 않았다. 강물을 바라보며 오다가 강물을 닮은 사람들에게도 있다.

 

아침에 눈뜨며 발견한 신발들, 몸은 정직한지라 모두들 피곤 때문에 신발을 대충 어지럽게 벗어놓고 다들 잤는데 눈앞의 광경은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질서정연하게 놓인 신발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 켠이 짠하다. 소소한 생활에도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지율스님의 더듬이가 내 속으로 퍼져온다. 강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스님의 세밀한 마음 씀씀이가 순례객들의 마음에 흘러 감염된다. 무감각한 신경이 부서져 내린다.

 

밖에 나갔다. 찬 기운이 정신을 퍼뜩 들게 한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희뿌윰한 새벽공기를 뚫고 빛나는 북극성, 북극성이 더욱 환하게 커지며 송두리째 나를 사로잡는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들의 북극성은 어디에 있는지, 어제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길 위에 선 스님을 떠 올린다. 그리고 강, 강, 하고 속으로 자꾸 되뇌어본다. 여러 갈래의 울림이 가슴 밑바닥에서 번져 나온다.

 

북극성 바라보며 어제 저녁, 흐르는 강, 흐르는 마음 나누기 시간에 안동에서 오신 분이 낭송하신 서사대사의 한시 ‘답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내린 들판을 걸어 갈지라도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어지러히 걷지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 될 것이리니.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는 둘째날 여정을 내딛는다. 그 여정은 우리를 둘러싼 기막힌 대조법을 극복하는 처음 뿌리에 맞닿는 발걸음 내디딤이다. 강을 거슬러 시간을 거슬러, 묻히고 잊혀진 우리의 감수성과 정서의 끝자락에 닿아 다시 되살림의 시간으로 만들어가는 길이다. 버려두었던 예던 길을 다시 돌아봄이다.

 

첫째 조각 - 부용대

 

스님이 데워준 호박죽으로 허기를 달래고 길을 떠난다. 스님이 세밀하게 던져주는 하나 하나 풀씨 조각들을 가슴에 심기 위해서 아침을 깨운다. 아직 햇살이 닿지 않은 논둑길이 발바닥에 닿아 퍼드득 퍼드득 소리를 내며 일어난다. 귀로 전해져 오는 상쾌한 울림, 그 울림을 맘껏 누리며 느릿 느릿 걷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살벌한 풍경, 논 가운데 촘촘하게 박아놓은 빨간 깃발들, 열병식하듯 서 있는 깃발들은 신선한 새벽의 공기를 거꾸러뜨리는 장송곡의 전주와 같다. 시간이 지나면 저 곳도 파괴의 현장으로 빠르게 바뀌겠지,

 

강둑길을 지나 해돋이를 위하여 부용대에 오른다. 서애 유성룡이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지은 옥연정사를 왼편으로 하고 산에 오른다. 고즈넉한 새벽, 왼편 옆구리에 스쳐 지나가는 담장이 더욱 고즈넉하게 느껴진다. 시간은 조선시대로 성큼 와 있다. 많은 선인들이 스쳐 지나갔던 발자취를 따라 부용대 정상에 올랐다. 아, 회룡포의 감격이 되살아나 눈덩이 불어나듯 더욱 크게 가슴에 파르르 물결친다. 태극 문양을 그리며 휘돌아가는 낙동강과 그 치마폭에 폭 안긴 물돌이 마을, 선경(仙境) - 새벽강이 피워 올리는 안개 속에 둥 둥 떠 있는 연꽃이여-

 

그 연꽃 너머 꽃산 등성이에 바야흐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빛의 일렁임이 점점 위로 기운을 토해내다가 옆으로 퍼진 띠가 높아지다가 조금씩 조금씩 붉은 원 제 모습을 수줍게 드러낸다. 찰나다. 모두 숨을 죽인다. 그러다 여기 저기 어, 어, 오, 오, 하며 말더듬이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감탄사를 바친다. 조그맣던 원이 더욱 커지며 빛무리를 마구 쏘아댄다. 그 빛무리에 모든 생명이 잠을 깬다. 강과 마을을 감싸고 있는 광배다. 화룡점정(畵龍點睛), 이에 더 덧붙일 표현은 없다. 어제 해넘이의 강과 오늘 해돋이의 강, 강은 흐르고 해는 어김없이 지고 떠오르고, 그 아찔한 순간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가 있다. 스님이 연출하고 자연이 연기하는 저 세밀한 드라마가 가슴에 팍 꽂힌다. 나도 그 드라마의 일부가 된다. 누구라도 직접 이 드라마에 참여하고 보아야 한다. 그 때서야 자연이 지닌 원형질과 사람이 가진 원형질이 원래는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둘째 조각 - 하회

 

해를 품고 느릿 느릿 산을 내려와 옥연정사 지킴이 주인어르신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강기슭에 닿았다. 다들 신나고 들떴다. 강은 안개가 물씬 피어오르고 신비함마저 자아낸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사진에 담느라고 바쁘다. 스님도 무심하듯 유심히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은 마구 뛰어다니며 신나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담는 우리가 그 자연의 배경이 되었다.

 

강을 건넌다. 하회 마을에서 전화 받고 건너오신 나룻배에 오른다. 사공은 말이 없다. 처음 두 서너번 노를 젓다가 물의 흐름에 배를 내맡긴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강 물결 따라 배는 떠간다.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런 배의 속도를 온몸에 각인시킨다.

 

하회에 닿았다. 건너온 곳을 바라본다. 해돋이 하기 위해 올랐던 부용대를 보니 깍아지른 절벽이다. 그 풍경을 보며 순례객 중 안동이 고향인 사람과 “묵은 세배와 새 세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묵은 세배는 섣달 그믐날 해 떨어지기 전에 하는 세배인데, 조상 덕에 한 해를 무사히 보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뜻과 함께 묵은 것을 떨쳐내고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려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른 지역에도 묵은 세배를 다 지내지 않느냐”고 한다. 하지만 묵은 세배는 안동 일부 지역에서만 남아 있지 다른 지역에서는 사라진 미풍양속이다. 한해를 성찰하고 세해를 맞이하는 게 시간의 단절이 아니라 계속된 연속성에 있고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연결되어 있음을 하회에서 본다. 우리에게 사라진 것이 비단 이 풍속뿐일까? 자꾸만 헛헛하다. 사라진 게 풍속이 아니고 우리가 공동체가 사라진 것은 아닌지,

 

그러다 하회를 둘러본다. 절묘한 조화를 본다. 만송정을 병풍 두르고 기와집과 초가집이 서로 서로 배경이 되어주고, 줄불놀이의 양반문화와 하회탈놀음의 평민문화가 공존하면서 줄불놀이의 뒷받침이 되어주는 평민들과 하회탈놀음의 후원자로서 양반들이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하회, 시간이 정지된 것 같지만 역동적으로 꿈틀대는 공간에서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위 아래가 뒤섞이는 지경을 엿본다. 하회에서 깨우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 각자의 빛깔과 향기를 간직하면서 조화를 이루어내는 모습,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더 큰 조화를 만들어가는 모습,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회가 던져주는 메시지다. 우리는 한옥의 부드러운 기와 선 처마아래에서 제 색깔과 향기를 간직하며 어우러짐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셋째 조각 - 병산습지

 

방사선으로 뻗은 하회마을길 따라 걷다 논길 걷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스님이 일명 ‘한국의 차마고도길’이라 칭하는 산길을 따라 가는데 마음이 기분 좋게 흔들거리며 뛰논다. 이쁜 모습 보면 가슴 뛰듯이 이쁜 길을 이쁜 사람과 거닐고 있으니 마냥 좋다. 창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시는 분은 동화를 간간히 쓴다고 한다. 자기가 쓰는 동화의 최초 독자가 아내라고 하면서 아내의 평을 구하면 아내는 짓궂게 시시하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네의 모습이 동화스럽다. 아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순례가 한편의 치열한 동화다.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고 그것을 감싸 안는 아름다움이 있으며 강을 따라 만들어 낸 숱한 조각들의 이야기가 있다.

 

완만하게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가노라니 아래편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본다. 스님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서 본다. 어제는 눈살 찌푸림과 가슴 짓누름이 주를 이루었다면 오늘은 눈이 맑아지고 가슴 환해지는 순례다. 둥 둥 구름 떠가듯 한다. 인간의 손길이 최소화 될 때 자연은 자연다와짐을 본다. 병산습지 내려갈 즈음 길옆에 군락을 이룬 나무를 본다. 나무 줄기 촘촘히 긴 가시를 박고 있다. 특이한 모양새 나무다. 딸과 함께 참가한 아주머니 한 분이 나무 이름이 무엇일까 궁금해 한다. 딸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무면서, 정겹다. 나무전체 윤곽은 또렷이 떠오르는데 이름은 아직도 모른다. 숙제다.

 

병산습지에 도착하여 스님이 질문을 던진다. “어제 보았던 내성천의 모습과 지금 여기 병산습지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내성천은 강 주변을 고운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면 병산 습지는 모래사장 대신에 갈대와 관목들이 뒤섞인 모습이다. “원래 병산습지도 내성천처럼 모래사장으로 덮인 곳인데 안동댐 때문에 모습이 이렇게 변화된 것이란다.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모래가 유입되지를 않고 강의 모습도 지금의 모습처럼 바뀌게 되었단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병산습지의 모습이 원래부터 그러한 모습일 것이라 여겼던 무지가 무너져 내린다. 우리의 생각도 감수성도 보이고 들리는 것에만 머물고 원래의 고왔던 모습을 떠올리고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처음 지닌 결과 뿌리 찾기를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랬구나, 그래서 스님이 어제 내성천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었구나. 강이 원래 지녔던 처음 순간의 모습, 그러다 또 죽비 “내성천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 내성천 위에서 내려오는 영주에 영주댐 건설이 무지막지하게 강행되고 있으니?

 

“병산습지, 옛날에 이곳은 입자가 다소 굵은 진모래 벌이었다고, 후삼국 시대 왕건과 견훤이 각축전을 벌일 때 모래를 파 진을 구축해서 진모래라고?” 그러면서 어제부터 강을 거슬러 온 모든 조각과 낙동강 전체 모습과 낙동강 사업의 문제점을 한 실에 꿰는 일을 스님은 눈앞에 펼쳐 보인다. 스님 옆에 계신 분이 지니고 있던 등산용 지팡이를 건네자 사양하며 나뭇가지를 주워 진모래벌에 낙동강 전 줄기를 그려나간다. “국토를 우리 몸에 비유하면 낙동강은 거대한 정맥이라고,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내리고, 황백산에서 내려오고, 소백산에서 영주를 거쳐 예천으로 물길이 내려오는, 일명 북에서 남으로 물이 내려오다, 물줄기가 동에서 서로 물길을 바꾸고, 바뀐 물줄기는 다시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다, 다시 서에서 동으로 물길을 섞바꾸어 틀며 부산바다로 빠진다. 낙동강 전체 흐름은 거대한 줄기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방향이 섞바꾸는 형국이다. 그러니 물의 흐름도 느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4대강 사업은 그 방향을 직선으로 만들고 보를 쌓고 물을 가두겠다고 하니, 신의 섭리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자연의 질서도 거스르고, 인간이 가진 합리적인 이성마저 파괴하는 저 야만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더 끔찍한 것은 갑작스런 기후변화로 인한 집중호우로 상주보가 무너질 경우 발생할 재앙은 낙동강 전 구간에 설치된 보마다 영향을 미치는 도미노 현상이 나타나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다.” 어제 상주보 현장에서 느꼈던 아픔과 전율이 끔찍함으로 바뀐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오한이 든다.

 

“ 여러분도 낙동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걸으면서 느꼈을 것입니다. 앞 번 순례에 참가한 외국인 한 분은 전 세계 어디를 가 보아도 낙동강처럼 아름다운 강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래사장을 품고 있는 강은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없습니다. 태백산, 황백산, 소백산 모두 가운데 ‘백’자를 달고 있는데 이 산 모두 모래의 진원지입니다. 태백산 7부능선에서 조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태백산이 예전에는 바다 지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 흐름에 따라 깎이고 깎여 풍화되면서 강물 흐름 따라 모래사장을 만들었습니다.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의 모래도 낙동강이 준 선물입니다. 그런데 을숙도에 하구언 둑이 생기면서 더 이상 모래가 유입되지 않고 이제는 계속 모래를 사다가 퍼붓는 형국입니다.” 외부인의 눈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을 정녕 우리 스스로는 모르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꼴이다. 이번 순례의 종합적인 면을 쓱쓱 그려내는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귀를 쫑긋 그리며 스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변해가는 순례객의 표정을 보면서 지금 걷고 있는 이 걸음이 스스로를 살리고 주변을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걸음임을 실감한다. 자그마한 세부의 결을 놓치지 않고 그 결을 가로지르기 하며 엇섞어 진모래벌에 그려 놓은 작품은 시간이 흘러가면 희미해지고 끝내는 사라질 것이지만 스님의 음성과 소살거림은 현장에 있는 모두에게 박혀 더욱 새록 새록 새로워질 것이다. 스님이 순례객들의 가슴에 심어놓은 풀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명력있게 자랄 것이다.

 

기막힌 대조법을 극복하는 길은 저 강물에 있다. 우리가 거슬러 왔던 저 강물이 존재 자체로 해답을 던져준다. 북극성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강에도 있다.

 

넷째 조각 - 병산서원

 

병산 습지를 거쳐 병산서원으로 간다.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곁에 두고 관목숲을 스쳐 지나간다. 갈대의 서걱거림과 겨울을 이겨낸 앙상한 나무 가지들을 스치며 걷는다. 스님이 말씀하시길 “이 곳은 수달이 많이 서식합니다. 그런데 이 수달을 포획하려고 밀렵꾼이 극성을 부립니다. 밀렵꾼이 주로 출몰하는 시간은 비가 많이 내리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심해 일반인이 다니기가 힘든 야밤입니다. 저도 순례길에 밀렵꾼을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극악함은 상식을 넘어서지요. 그 때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정말 짐승보다 무서운 게 사람임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또 생각하며 느낀다. 평화는 어디에 있는지, 너무나도 끔찍한 일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음을, 무딘 생각들을 추슬러 본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눈을 옆으로 돌려본다. 강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너무 평화롭다. 그런데, 반짝거리는 저 물 바닥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내 가슴 밑바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고 궁싯거려본다.

 

또 걷는다. 걷다가 눈에 들어온 버들강아지, 모두들 환호성을 지른다. 버들강아지에 손을 대 본다. 그 부드러운 감촉에 자지러진다. 그 부드러운 촉감을 생각으로 전이시킨다. 계절은 어김없이 봄이다.

 

병산서원 어귀쯤에 다다라 강 건너 깎아지른 절벽을 본다. 누군가 곁에서 “저 절벽의 모습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아침에 볼 때 다르고 저녁에 볼 때 다르고, 계절마다 모습이 다르다”고 차분히 이야기한다. 비경이다. 이런 비경을 보고 매일 산다면 마음 닦음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겠다. 마음 일그러진 사람을 감옥에 가둘 것이 아니라 이런 곳에 살게 한다면 분명 마음도 선해질 것이라는 공연한 생각을 한다.

 

병산서원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지나온 시간을 반추한다. 강물이 흐른다. 만대루에 올라 강을 본다. 강이 흐른다. 강내 품은 바람이 불어온다. 상쾌하다. 쉼을 하고 있는 순간 순간들이 지붕 떠받고 있는 기둥때깔처럼 풋풋하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때깔, 저 때깔은 시간이 만들어 낸 풋풋함이다. 앞을 바라보자 나를 오롯이 꽉 채우며 강이 들어온다. 저 강도 수많은 시간이 만들어 논 것이다.우뚝 솟은 절벽을 안고 흐르는 강물은 어제도 오늘도 푸르게 흐른다. 아니 내일도 변함없이 흘러야 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쉼을 하고 있는 이 병산 서원은 또 어떻게 흐를까?

 

다섯째 조각 -마애

 

강을 멀게 가까이 두며 걷는다. 계속하여 걷는다. 햇빛에 일렁이는 강물을 두고 걷는다. 다리가 팍팍하다. 어떤 이가 반짝이는 물빛을 보고 보석방울이라고 한다. 가다가 쉴 참에 이우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가 이번 순례에 참가한 이의 고운 노래를 들었다. 소리가 너무 곱다. 듣고 있는 이들의 표정이 환하다. 또 걷는다. 앞서 걷고 있는 이의 가방에 꽂혀있는 단추에 “no cable" 문구가 크게 들어온다. “올해 국립공원법이 바뀌어 각 지방마다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앞 다투어 설치하려고 한다.”며 산이 파괴될 위기에 처한 실상을 들려준다. 강이든 산이든 돈 앞에 맥을 못 춘다. 그러면서 길가 가로수에 매달린 나방 유충을 보며 각각의 이름을 알려준다. 나방 유충을 보고 마냥 좋아하는 그 표정이 싱그럽다. 서울생태보전시민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인데 “북한산 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한다”며 싱그럽게 걷고 있다. 징검다리를 만들며 걷는다.

 

봄빛 일렁이는 풍산들 보며 걷는다. 웃음이 난다. 안동 사람들은 풍산들이 세상에서 제일 큰 들판으로 여긴다는 전에 읽었던 글귀를 떠올리며 슬몃 웃음이 난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인양 여기는 게 지금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이번 순례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강을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마애구석기유물박물관전시관에 도착했다. 구석기시대로 흘러왔다. 양날돌도끼를 보면서 이 도끼를 만든 그네들의 심성과 지혜를 떠올린다. 참 멀리도 왔다. 우리가 구석기인들보다 나은 것은 무엇일까? 양날돌도끼는 말한다. 지금의 나에게 낫다 못하다는 낱말의 경계를 지우라고,

 

이번 순례는 시간을 거슬러 가는 여정이었다. 현재에서 과거를 만나고 그 과거는 미래로 흘러간다. 있었던 과거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본 모습을 본 것인지 모른다. 잊었던 원래의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할 원래 모습을 미래에 다시 살려내야 함을 본다, 강을 거슬러 가면서 강을 품었고 강을 만났다. 강이 지닌 원래 모습을 보았고 파괴되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이번 순례가 아니었다면 강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기막힌 대조법을 만났고 그것을 통해 생명을 알았다. “낙동강 숨결 느끼기” - 숨결은 이미 내 안에 원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지내왔다. 그것을 일깨워준 1박 2일, 이렇게 일깨운 숨결을 내가 서 있는 현장에서 고르게 품어내야겠다. 회색빛연어가 심은 숨결이 강물처럼 고르게 흘러 감을 본다. “뿌린 곳은 몰라도 씨는 자란다.” 그 풀씨들이 멀리 멀리 퍼져가 각각의 자리에서 뿌리내림을 본다. 기막힌 대조법을 넘어 이제 강에서 다시 바다로 왔다.

 

“강은 흘러야 한다”

 

봄빛 버무린 바다바람을 모든 분들에게 띄웁니다. -거제도에서

 

강은 나려 바다에 이르는데 저는 거제 바다에서 강을 거슬러 갔습니다. 그리고 깨달음 "모든 만물은 자연스레 제 숨결 토해 내고 흘러야 함을" 그것을 일깨워주신 지율스님, 천경배신부님, 강습사 회원여러분, 그리고 함께 한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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