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강
기억한다는 것은 흘러가는 물길을 거슬러 가는 것과 같은 일이지만 지난 1월 낙동강을 답사하고 돌아 온 후....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을 헤매였다.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께서는 나를 등에 엎고 서울로 올라왔고 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노량진 본동 산동네에 자리를 잡으셨다. 그러하기에 나는 줄 곳 한강을 바라보고 자랐지만 기실은 줄곳 한강의 변화를 지켜보며 자랐다.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백사장의 모래톱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보았고, 모래톱이 사라지자 고무신으로 잡아올리던 송사리떼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보았으며 낚시꾼들이 사라지고 고기배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케이트를 타던 중도가 사라졌고 이후 더 많은 것들이 사라졌으며 더 많은 것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들어 왔다. 깊고 푸르고 물살이 빨랐던 한강은 편편하고 느리고 완만하여졌다. 물론 물이 더러워지고 더 이상 강에서 수영을 할 수 없다거나 고기 잡이를 할 수 없게 된 것이 누구의 탓은 아니다. 서울의 인구가 10 배나 불어났으니까.
2 녹색개발
지난 달 조선, 동아 소송심리에 참석하고 내려오는 길에 여의나루 쪽에서 잠시 들렀다. 어린시절 땅콩 서리를 하러 다니던 곳은 지금은 어디메라고 가늠하기 조차 어려웠고 강변은 공사중이었다. 그곳에서 추억을 꺼내는 것은 - 자랑거리가 아닌 나이를 꺼내는 것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조금 가까이 가보니 공사는 4 대강 정비사업 홍보 용지에 삽입되어 있는 수생 식물대를 만드는 작업인 듯 했다. 두 대의 포크레인이 자비를 베풀 듯 그 커다란 손을 움직여 모래를 밀어내고 돌을 쌓고 있었다. 멀리 건너다 보이는 희뿌연 아파트 숲만 아니라면 잠시 눈길을 주고 이 공사 현장을 무심하게 바라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공사현장을 보며 이제는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게 된 한강 백사장과 낙동강가의 가없는 모래벌을 가슴에서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3 낙동 걷기를 떠나며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머리 숙였던 대통령은 '4대강 정비면 어떻고 대운하면 어떠냐'고 자문자답하고, 당대표는 '전 국토가 공사현장 처럼 느껴지게 건설의 망치소리 들리게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야기를 들으며 무기력한 분노로 온몸이 떨렸고 한 세계가 문저져 가는 문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고 다음순간 말과 질문을 빼앗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답이 없다고 해서 묻기를 그 칠 수는 없으며 답찾기를 게을리 할 수도 없기에 내 안의 질문들이 던져져 있는 곳으로 발걸음 해보려한다. 당분간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지난 3년 동안 열어 두었던 산막의 문을 닫고 낙동강을 걸으며 강의 소식을 전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려 한다. 아직은 구름이 깊지만 내일은 맑음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