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천 우감마을에 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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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제가 살던 마을에 늘 중얼거리며 다니시던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후, 시장 통에서 장사하며 아들 4형제를 혼자 키우셨는데 멀쩡하게 잘 크던 아들들이 스므 살만 넘으면 사고로 죽어 갔다고 합니다. 아주머니는 장성한 아들 셋을 먼저 보내고 막내 아들과 둘이 살 때 까지는 가계문을 닫는 일이 없으셨던 억척스런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대학 2학년이던 막내아들이 친구들과 강에 갔다가 익사한 시신을 보고 오신 후, 그 길로 그만 실성해버렸다고 합니다.

그 때 이야기를 전해주던 할매가 “중 팔자였는데 시집을 갔기 때문” 이라고 하셨던 말끝이 왠지 머릿속에 깊이 남았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저는 늘 중 팔자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연 복이 없는 것, 인연 복이 지어지면 그때부터 팔자가 사나와지는 것이려니 했습니다.

한참을 잊고 있었던, 시장 통의 아주머니 생각이 다시 생각난 것은 지난겨울 내성천 변의 벌목 현장을 보면서였습니다.천성산 벌목현장을 보고 환경문제에 첫발을 딛었고, 나무가 베어지는 터널 입구 벌목현장에 앉아 있던 이유로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고 그로인해 2년간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 동안 낙동강 공사 현장을 헤매고 다녔고 수천, 수만의 나무가 베어지는 현장에 서있었으며 그 무너짐들을 두 눈에, 랜즈에 가슴에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제게 “참, 독하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저는 우리가 걸어 온 길이 덤풀속에 덮히지 않아야 돌아 갈 길을 만들 수 있다고 답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내성천 벌목현장을 보면서, 조만간 저도 아들 넷을 모두 잃은 아주머니처럼 미치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지막 남은 모래 강변을, 그 강변에 깃들어 사는 여린 생명들에 손을 댈 수 있을까?' 하는 그 의문부터가 저를 힘들게 합니다.

지난해 초 지천 공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들과 내성천가에 월세를 얻어 거처를 마련하고 조계사 입구에 컨테이너 전시공간을 운영하며 내성천 1평사기 운동과 매주 자전거 답사 등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내성천 모래 강 길을 수없이 안내했지만 저는 단 한 번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강을 보지 못했고, 늘 어디를 헤매고 다니는 듯, 허공을 걷는 듯 했습니다.

이 땅의 순정한 아름다움이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이 걸음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쌌던 짐을 풀어 놓고 걸어 온 발걸음을 지워버립니다. 내일을 걷기 위하여